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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순칼럼] "어머니! 항아리가 깨져버렸어요."

뒤뜰로 내친 항아리가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꿈이었다. 새벽 여명에 비몽사몽으로 뒤뜰로 나갔다. 아, 깨진 항아리! 어른 손바닥만큼의 주둥이가 떨어져 나간 항아리는 마치 전장에서 다리 한쪽을 잃은 상이군인처럼 처량하게 뒤뜰 모퉁이에 놓여있었다. '제발, 나를 내치치 말라'고 속살거리는 듯했다. 조심스레 항아리를 물가로 옮기고 깨진 조각을 주워다가 물줄기를 대고 씻겼다. 목욕을 시키고 나니 정갈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물기를 닦아 집안으로 데려오니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다. 항아리는 내게 화답이라도 하는 양 살아숨쉬는 듯 형형한 빛을 토해낸다.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깨진 항아리가 집안에서 안식중이다. 아침 식전, 그것과 눈 맞춤한 남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저걸 왜 들여왔어?"

"눈물이 나서…. 잠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데려왔어. 안쪽으로 테잎을 붙이려고 깨진 조각을 살짝 맞춰놓았고요.”

“그럼 접착제로 붙여줄까?”



“오호, 그 방법이 있었군!”

일순 한 폭의 정물화가 뇌리에 들어와 내게 말을 건다. 마른 꽃을 사다가 상처난 항아리에 소복이 꽂아두면 집안이 등불켜듯 환하리라! 잰걸음으로 접착제를 가져온 남편이 깨진 조각을 감쪽같이 붙였다. 삽시간에 봉합수술을 마친 항아리에는 살갗을 꿰맨 흉터가 선명하게 남았다. 중환자 같다. 상처를 견뎌낸 아픔이 오롯이 배어있어 마음이 아프다. 봉합부위가 언제고 풀릴 것 같아 못내 불안하지만 앞으로도 죽 제 아픔을 견디며 내 삶을 지켜보리라. 나와 계속 가리라는 안도감에, 돌연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 젊은 날, 시어머님의 따스한 손길, 내 삶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는 항아리! 나와 함께한 세월을 톺아보니 22년이다. 스물두해 전 5월, 결혼하고 달포쯤 지났을까? 시월드 식구들을 초대해 집들이하던 날, 시어머님께서는 올망졸망 물건들을 짊어지고 오셨다. 당신께서 소중히 여긴 삶의 세간을 맏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싶었을터…. 그중 내 가슴에 남은 것이 두 가지. 시어머님께서 착용하던 한복 저고리를 장식하는 노리개, 고려청자만큼이나 섬세하고도 정교하게 빚은 검은빛 항아리, 바로 이틀전 깨져버린 항아리다. 쌩쌩하고 팔팔하던 시절, 천둥벌거숭이는 시어머님의 깊은 속내가 깃든 항아리의 진가를 알리 없었다. 고작 된장이나 간장 따위가 담길 일개 그릇이라 여겼다. 인생의 쓴맛, 단맛, 짠맛, 시금털털한 맛까지 죄다 보고 비바람에 허덕이다 보니 스물두해는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지나갔다. 그사이 나는 초록을 잃어 가을빛이 되었고, 이제야 항아리 속에 담긴 시어머님의 심연이 맑은 잔의 주스처럼 훤히 보인다. 깨진 항아리의 존재로 인해 밤잠을 설친 것도 순전히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잃을까하는 두려움과 안타까움에서다. 연일 가슴이 허탈하고 아팠다. 슬프고 속상했다.
그늘에서도 빛날줄 아는 항아리! 오늘에야 알았다. 항아리가 시어머님의 단아한 맵시와 온화한 성정을 고스란히 닮았다는 걸. 연륜많은 어느 도공의 손에서 태어난 항아리는 22년 전 서울에서 나와 일면식을 치른 후 남편의 발령지를 따라 부산, 마산, 수원을 찍고 서울로 재입성했다. 급기야 태평양 건너 애틀랜타까지 왔다. 10년 전 미국행을 결정했을 때 고민 꽤나 했다. 사용하던 세간살이를 어떻게 정리할지. 애지중지 사용하던 물건들을 처분하려니 밟히는 것이 한두가지랴. 이런저런 인연으로 내게 온 것들을 함부로덤부로 아무에게나 내줄수 없어 자식처럼 기르던 화초는 정성 가득한 언니들에게, 서가의 책들은 동생, 친구, 조카네로 입양을 보내고 가슴 찡한 것만 데려왔다. 그중 하나가 깨진 항아리니, 귀하신 몸이다.
허술한 살림살이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럽다. 작고하신 어머님께도 죄송하고…. 기실 항아리는 수난을 겪었다. 장을 못 담그는 내게 와 여름엔 오이를, 겨울엔 김치를 품었다. 항아리가 깨진 날도 그랬다. 오이 수십개에 펄펄 끓는 소금물을 품고 사흘째 되던 날, ‘퍽’ 하고 맥을 놓아버렸다. 조각이 내동댕이쳐진 순간, 어머님과의 추억이 물밀어 들어 눈물 바람을 했다. 총총히 마른 꽃을 사다가 꽂으니 슬픔이 덜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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